결승선보다 내 속도가 중요해졌던 어느 날

무선 이어폰에서 음악이 들리고 있었고, 눈앞에는 오르막길이 이어졌습니다. 광명 KTX 하프마라톤을 뛰던 때였습니다.

그날은 대회에서 처음으로 이어폰을 끼고 달렸습니다. 주변에는 저보다 빠르게 앞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일정한 속도로 계속 달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앞사람이 멀어지는 모습부터 신경이 쓰였을 텐데 이상하게 그날은 달랐습니다.

누구를 따라잡아야겠다는 마음보다 귀에 들리는 음악과 주변 풍경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오르막을 만나면 힘이 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옆 사람 속도에 맞춰 무리해서 올라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제가 계속 갈 수 있는 속도로 발을 옮겼습니다.

처음 5km에서는 앞사람만 보고 뛰었습니다

광명에서 달리던 그날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처음 5km 대회도 생각납니다. 두 대회에서 제가 달리는 모습이 꽤 달랐기 때문입니다.

처음 5km에 나갔을 때는 출발하자마자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앞사람들이 나가니 저도 같이 나갔습니다. 짧은 거리라고 생각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떠올려도 초반에는 거의 100m 달리기를 하듯 힘을 썼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잘 뛰고 있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앞으로 나가고 있으니 괜히 기분도 좋았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몸이 금방 힘들어졌습니다. 처음에 너무 써버린 힘을 다시 되돌릴 방법은 없었습니다. 뒤로 갈수록 달리는 것이 버거워졌고 결국 걷게 됐습니다.

그때는 결승선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만 계속 생각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빨리 가고 싶은데 몸은 이미 그렇게 움직여주지 않았습니다. 제 몸이 어떤지 살피기보다 다른 사람과 남은 거리만 보고 달렸던 셈입니다.

그 경험이 조금 창피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오래 남았습니다. 풀코스나 하프마라톤처럼 더 긴 거리를 뛰게 됐을 때 초반에 무작정 따라가지 않게 된 데에는 그때의 기억도 있었습니다.

광명에서는 지나가는 사람을 그냥 보낼 수 있었습니다

광명 KTX 하프마라톤에서는 앞에 오르막이 보였습니다. 평지만 이어지는 길과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몸에 힘이 들어가면 속도를 조금 늦췄습니다.

누군가 옆으로 지나가도 그대로 두었습니다.

예전이라면 조금 달랐을 겁니다. 누가 저를 지나가면 괜히 마음이 급해졌을 것입니다. 나도 저 사람만큼은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날은 이어폰을 한번 고쳐 끼고 다시 제 발걸음에 집중했습니다.

음악이 계속 들렸습니다. 주변 풍경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르막에서는 제 호흡을 살피면서 갔고 조금 편해지면 그 흐름을 그대로 이어갔습니다.

특별한 달리기 방법을 생각하고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기록을 계산하면서 움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날은 그냥 그렇게 달리는 것이 편했습니다.

앞에서 달리는 사람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도 큰일이 난 것 같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지나가고 또 다른 사람이 지나가도 제 발걸음은 그대로였습니다.

대회에 참가했으니 당연히 결승선까지 가야 했지만 이상하게 결승선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몇 걸음이 편한지, 호흡이 너무 가쁘지는 않은지, 지금 이 속도로 계속 갈 수 있을지를 몸으로 느끼며 달렸습니다.

오르막보다 마음이 달라진 것이 더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 하프마라톤이 쉬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르막도 있었고 거리도 짧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유난히 힘들었던 대회로는 기억되지 않습니다.

처음 5km 때와 비교하면 몸보다 마음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 속도가 제 달리기에 큰 영향을 줬습니다. 앞에서 누가 뛰면 따라가고 싶었고 뒤처지는 것 같으면 괜히 마음이 급했습니다.

광명에서는 그 마음이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일정하게 달리는 사람은 자기 속도로 갔습니다. 저 역시 제 방식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대회 안에서도 꼭 다른 사람과 같은 속도로 움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몸으로 느낀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제가 계속 갈 수 있는 움직임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변화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5km에서 초반부터 힘을 써버린 경험도 있었고, 평소 달리면서 혼자 제 속도를 찾아보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다가 광명에서 달릴 때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습니다.

결승선이 멀어도 마음이 급하지 않았습니다

마라톤에 참가하면 결국 결승선은 있습니다. 그곳을 통과해야 대회도 끝납니다.

예전의 저는 그 끝을 너무 빨리 보고 싶어 했습니다.

처음 5km에서는 시작하자마자 결승선 쪽으로 마음이 먼저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중간 과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광명에서는 조금 달랐습니다.

결승선이 아직 멀리 있어도 괜찮았습니다. 당장 눈앞의 오르막을 지나고, 음악을 들으며 몇 걸음씩 계속 움직였습니다.

앞사람과 거리가 벌어져도 그대로 뒀습니다. 대신 제 호흡과 발걸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달리는 시간이 이전보다 길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경치가 보이고 음악이 들렸고, 제 몸의 움직임도 느껴졌습니다.

기록을 내겠다고 이를 악문 것도 아닌데 그날의 달리기가 편하게 기억되는 이유가 아마 거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승선만 보고 뛰는 것이 아니라 그곳까지 가는 시간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지금 떠오르는 것은 순위보다 그날의 발걸음입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니 광명 KTX 하프마라톤에서 누가 저보다 먼저 들어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저를 추월했던 참가자들의 얼굴도 하나하나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대신 이어폰에서 음악을 들으며 달리던 느낌은 남아 있습니다. 앞에 이어지던 오르막도 생각납니다. 누군가 저를 지나가도 괜히 따라붙지 않고 그대로 달리던 장면도 떠오릅니다.

그전까지는 대회에 나가면 결승선이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빨리 그곳에 도착하느냐에 마음이 많이 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명에서 달리던 날에는 조금 다른 것을 느꼈습니다.

결승선은 결국 한 번 지나가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도착하기까지는 훨씬 긴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을 너무 서두르면 제 몸부터 힘들어졌습니다. 반대로 제 속도를 찾으면 주변도 보였고, 음악도 들렸고, 달리는 시간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날을 떠올리면 결승선을 통과했던 순간보다 중간에 이어폰을 고쳐 끼고 다시 제 속도로 달리던 모습이 먼저 떠오릅니다.

누군가는 앞으로 갔고, 저는 그대로 달렸습니다. 오르막에서는 조금 늦췄고 다시 편해지면 계속 갔습니다.

결승선보다 제 속도가 중요해졌다는 것을 그때는 굳이 말로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달렸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 돌아보니 그날 이후 대회를 바라보는 마음이 조금 달라졌던 것 같습니다. 빨리 끝내는 것보다 끝까지 제 발걸음을 이어가는 일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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