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선보다 내 속도가 중요해졌던 어느 날
이미 제대로 묶여 있던 운동화 끈인데도 손이 또 갔습니다. 한 번 당겨 보고, 발끝을 움직여 보고, 허리도 한번 펴봤습니다. 출발선 가까이에 서 있으니 사람들 움직임 하나하나가 평소보다 크게 보였습니다.
누군가는 몸을 풀고 있었고, 누군가는 신발끈을 다시 묶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발을 구르는 소리와 짧은 말소리가 섞였습니다. 저도 가만히 있지 못했습니다. 할 수 있는 준비는 이미 다 했는데도 뭔가 하나 더 확인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풀코스는 짧은 대회를 앞두고 서 있을 때와 느낌부터 달랐습니다. 아직 한 발도 뛰지 않았는데 머릿속은 벌써 한참 앞에 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처음 5km 대회에 나갔을 때는 주변 분위기에 휩쓸렸습니다. 출발하자마자 앞사람을 따라가느라 제 속도라는 것을 거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짧은 거리라고 생각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너무 세게 뛰었습니다. 나중에 돌아보면 100m 달리듯 나갔다는 말이 맞을 정도였습니다. 초반에는 괜찮은 것 같았지만 뒤로 갈수록 숨이 차고 다리가 무거워졌습니다. 결국 막판에는 걸었습니다.
그 기억이 풀코스 출발선에서는 자꾸 떠올랐습니다.
이번에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천히 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되뇌었습니다. 긴 거리를 앞두고 있으니 처음부터 제 속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 마음은 꼭 같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앞쪽 사람들이 조금씩 자리를 옮기면 저도 덩달아 앞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아직 출발 신호도 나지 않았는데 몸보다 마음이 먼저 달리고 있었습니다.
제 옆에 서 있던 한 참가자도 말없이 몸을 풀고 있었습니다. 두 팔을 몇 번 흔들다가 멈췄고, 잠시 출발선 쪽을 바라봤습니다.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보였습니다.
정확히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시간이 지나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오래 이야기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 자리에 서 있으면 굳이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비슷한 마음이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초반에 욕심을 내지는 않을까. 준비한 만큼 몸이 따라줄까. 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옆 사람의 표정이 괜히 눈에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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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시 발끝을 움직여 봤습니다. 허리를 한번 펴고, 또 신발끈을 눌러봤습니다.
이미 단단히 묶여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손이 갔습니다. 뛰기 전에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으니 괜히 그런 작은 행동을 반복했던 것 같습니다.
풀코스를 위해 준비해 온 시간은 이미 지나가 있었습니다. 출발선에서 갑자기 연습을 더 할 수도 없었고 몸을 새로 만들 수도 없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출발해서 제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물은 충분히 마셨는지, 초반 속도를 너무 내지는 않을지, 중간에 힘들어지면 어떻게 할지, 끝까지 갈 수 있을지 여러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랐습니다.
그중에는 지금 생각해도 당연한 걱정이 있었고, 출발하고 나면 별 의미가 없었던 생각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을 구분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사람들 틈에 서서 앞으로 조금 움직였다가 멈추고, 다시 한두 걸음 움직였습니다. 주변에는 계속 소리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오히려 제 호흡이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이 많은데 혼자 있는 듯한 느낌이 잠깐 들었습니다.
다른 참가자들도 모두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습니다. 각자 준비해 온 시간도 다르고 목표도 달랐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두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발 신호가 가까워지면서 앞쪽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그 흐름을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 몇 걸음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전까지는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는데 막상 출발선을 지나고 나니 머릿속이 조금 단순해졌습니다. 이제는 물을 마셨는지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신발끈을 또 만질 일도 없었습니다.
앞사람의 등을 보면서 발을 움직이는 일이 먼저였습니다.
처음 몇 걸음을 내딛고 나니 출발 전의 긴장과 실제로 달리는 일은 꽤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출발 전에는 멀리 있는 일까지 한꺼번에 생각했는데 뛰기 시작하니 당장 해야 할 것은 한 발씩 앞으로 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저는 처음 5km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괜히 앞사람 속도에 맞추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앞으로 나간다고 함께 쫓아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출발선에서는 마음이 자꾸 앞으로 갔습니다. 막상 달리기 시작하고 나서야 조금씩 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풀코스를 떠올리면 결승선을 통과했던 순간만 남아 있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 일도 아직 시작되지 않았던 출발 직전의 장면이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이 한 방향을 바라보고 서 있던 모습, 누군가 팔을 흔들며 몸을 풀던 모습, 계속 신발끈을 만지던 제 손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느 구간에서 힘들어질지도, 몸이 어디까지 버텨줄지도 출발선에서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더 바빴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 장면을 떠올리면 조금 웃음도 납니다. 신발끈을 몇 번 더 만진다고 긴 거리가 짧아지는 것도 아니고, 걱정을 많이 한다고 몸이 더 잘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때의 저는 그렇게라도 마음을 붙잡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운동화 끈을 한번 눌러보고, 앞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따라 천천히 발을 내디뎠습니다. 몇 걸음 뒤 출발선을 지나면서 그 많던 생각은 조금씩 뒤로 밀렸습니다.
풀코스의 긴 기억 가운데 제게 남은 첫 장면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달린 거리보다 먼저,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마음만 먼저 멀리 가 있던 그 아침이 떠오릅니다.
이때와 이어지는 달리기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