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며 생각이 정리됐던 경험
운동장에 나가 보면 늘 비슷한 사람들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뒤로 손을 깍지 끼고 천천히 걷는 어르신도 있었고, 이어폰을 꽂은 채 빠른 속도로 제 옆을 지나가는 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이에서 운동화 끈을 한 번 당겨 묶고 조용히 트랙 안쪽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부터 혼자 달리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같이 뛰던 사람과 시간이 맞지 않는 날이 있었고, 누군가에게 연락해서 약속을 잡는 것이 귀찮게 느껴진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 날에는 그냥 운동화만 신고 나갔습니다. 막상 혼자 운동장에 서면 처음 몇 분은 조금 심심했습니다. 옆에서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없고, 어디까지 뛰자고 정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용함이 어느 순간부터 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라톤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혼자 뛰는 일이 재미없게 느껴졌습니다. 대회에 나가면 출발하기 전부터 분위기가 전혀 달랐습니다. 사람들이 운동화 끈을 다시 묶고, 스트레칭을 하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웃었습니다. 스피커에서는 안내 방송이 계속 나왔고 출발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주변이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습니다.
출발 신호가 울리면 수많은 발소리가 한꺼번에 들렸습니다. 그때는 힘들어도 앞사람 등을 바라보며 따라갔습니다. 내 옆에서 누군가 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몇 킬로미터가 금방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평소 운동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함께 있어야 덜 힘들고, 그래야 오래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혼자 처음 달리던 날에는 반대였습니다. 출발선을 만들어 주는 사람도 없었고,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바퀴를 돌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다시 같은 자리에 돌아왔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바퀴, 세 바퀴를 돌면서 조금씩 다른 것이 보였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달릴 때는 앞사람을 따라가느라 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푸는 사람,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시는 사람, 반대쪽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 모습까지 천천히 보였습니다.
혼자 달리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속도였습니다.
몸이 무거운 날에는 그냥 천천히 뛰면 됐습니다. 조금 뛰다가 힘들면 걸었습니다. 누군가 기다리고 있지 않으니 미안해할 일도 없었습니다. 반대로 몸이 유난히 가벼운 날에는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달려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뛰는 것이 제대로 운동하는 건가 싶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를 추월하면 괜히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저도 모르게 속도를 올렸다가 금방 숨이 차서 다시 천천히 뛰었던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남보다 뒤처지면 운동을 못한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런데 계속 달리다 보니 그런 마음이 조금씩 줄었습니다.
"오늘 몸이 무거우면 천천히 가도 되고, 괜찮으면 조금 더 가면 됐습니다."
그 단순한 생각이 생각보다 편했습니다. 운동장 몇 바퀴를 더 도는 것보다 그날 내 몸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차리는 일이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김포에서 사무실을 운영할 때는 하루 종일 사람을 만나는 날이 많았습니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학부모 상담을 하고, 찾아오는 분들의 생활 고민을 듣다 보면 저녁에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피곤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사무실 문을 닫고 나면 하루 동안 들었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누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 조금 다르게 이야기했어야 했던 것은 없는지 이런 생각들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런 날 운동장에 혼자 나가면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첫 번째 바퀴를 돌 때는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이 그대로 생각났습니다. 두 번째 바퀴를 돌 때도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달리다 보면 이상하게 생각이 하나씩 줄었습니다.
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리고 숨소리가 일정해졌습니다. 밤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면 머릿속에 있던 일들도 조금씩 멀어졌습니다.
특별한 답을 찾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민이 해결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운동을 끝낼 무렵이면 나오기 전보다 마음이 조용해져 있었습니다.
그 느낌 때문에 점점 혼자 달리는 시간이 기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운동장에서 혼자 계속 달리는 사람을 보면 심심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대화할 사람도 없고, 힘들 때 서로 격려해 줄 사람도 없으니 재미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뛰게 되고 나니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말없이 일정한 속도로 트랙을 도는 사람을 보면 괜히 이해가 됐습니다. 저 사람에게도 오늘은 혼자 있고 싶은 하루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 종일 사람 속에 있다가 잠시 조용한 시간이 필요했을 수도 있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뛰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혼자 달리는 시간이 외롭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주변에는 분명 사람들이 있었지만 각자 자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누구는 빠르게 뛰고, 누구는 천천히 걸었습니다. 저는 그 사이에서 제 속도로 움직였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달리는 즐거움은 여전히 있습니다. 대회장에서 느끼는 분위기나 함께 출발할 때의 긴장감도 좋습니다. 하지만 평소에는 꼭 누군가를 따라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요즘도 운동화를 신고 혼자 나가는 날이 있습니다. 대단한 목표를 정하지도 않습니다. 몇 바퀴를 돌지, 얼마나 빨리 뛸지도 나가서 몸을 움직여 본 뒤 정합니다.
한참 뛰고 나서 땀에 젖은 옷을 한 번 털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었고, 말을 잘해야 할 이유도 없었던 시간입니다.
예전에는 혼자 달리는 것이 심심해서 오래 못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아도 되고, 아무도 따라갈 필요가 없는 그 시간이 좋습니다. 사람이 없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시간만큼은 그냥 제 속도로 있어도 된다는 점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몸의 피로가 달라지고 잠드는 시간도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아래 두 이야기를 함께 보면 혼자 달리던 시간이 생활 속 변화로 어떻게 이어졌는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함께 보면 흐름이 더 잘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