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며 생각이 정리됐던 경험

“내일은 무엇부터 해야 하지.”

이런 생각이 한번 시작되면 꼬리에 꼬리를 물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무실 문을 닫고 나왔는데도 머릿속에서는 일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낮에 들었던 말이 다시 생각나고, 해야 할 일도 하나둘 떠올랐습니다. 돈 걱정까지 겹치는 날이면 집에 바로 들어가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이상하게 강변 쪽으로 발길이 갔습니다. 계획하고 나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와 조금 걷다 보면 어느새 달리고 있었습니다. 처음 몇 분은 운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다리는 앞으로 움직이는데 머릿속은 여전히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는 운동을 하러 나갔다기보다 복잡한 하루를 잠깐 내려놓을 곳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사무실을 나와도 일은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김포에서 작은 공간을 운영하던 시절에는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학부모 상담을 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싫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바쁘게 움직이는 날에는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문제는 일이 끝난 다음이었습니다.

사무실 문을 닫고 불을 끈 뒤에도 낮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상담하면서 했던 말이 마음에 걸릴 때도 있었고, 예약이 뜸한 날에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도 됐습니다.

특히 일이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 시기에는 작은 일도 크게 느껴졌습니다. 누군가 무심코 한 말도 혼자 몇 번씩 다시 생각했습니다.

“내가 괜히 그렇게 이야기했나.”

“다른 방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답이 바로 나오는 것도 아닌데 같은 생각을 계속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오히려 생각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런 날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오면 적어도 몸은 다른 곳으로 움직였습니다. 사무실 안에 있을 때와는 공기부터 달랐습니다. 문을 닫고 건물을 빠져나와 강변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얼굴에 닿는 바람부터 느껴졌습니다.

강변에 내려가면 들리는 소리가 달라졌습니다

저녁 강변에는 낮과 다른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는 하늘에 푸른빛이 조금 남아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건너편 아파트 창문에 불이 하나둘 들어왔습니다.

자전거 한 대가 옆으로 지나가면 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금방 멀어졌습니다. 산책 나온 부부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이어폰을 끼고 빠르게 걷는 사람도 있었고, 강아지 줄을 잡고 잠깐 멈춰 서 있는 사람도 보였습니다.

그 사이를 달렸습니다.

처음에는 머릿속이 그대로였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내일 해야 할 일도 생각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사무실에서 했던 고민을 장소만 옮겨서 계속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숨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 발, 또 한 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소리도 점점 크게 느껴졌습니다. 바람이 땀난 얼굴에 닿으면 시원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머릿속에 들어 있던 생각들이 하나씩 줄었습니다.

무언가 좋은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생각을 덜 하게 됐습니다.

“오늘 할 일은 여기까지였구나. 나머지는 내일 생각하면 되겠구나.”

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마음속에서 정리되고 나면 발걸음도 조금 편해졌습니다.

답을 찾기보다 필요 없는 생각이 줄었습니다

마라톤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이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체력이 부족하다고 느껴 달리기를 시작했고, 처음에는 얼마나 오래 뛸 수 있는지가 중요했습니다.

몇 킬로미터를 달렸는지 확인하고 기록이 조금 좋아지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예전보다 오래 뛰었다는 사실도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달리는 이유가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기록을 확인하는 즐거움보다 혼자 움직이는 시간이 좋아졌습니다. 누구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됐고, 누군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하루 종일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나면 그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가끔은 달리면서 마음속으로 혼자 묻기도 했습니다. 왜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 답을 얻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몇 킬로미터 달리고 나면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일과 내일 하면 되는 일이 조금씩 구분됐습니다. 아까는 모두 급한 일처럼 느껴졌는데 달리고 나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걱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크기가 조금 작아진 느낌이었습니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돌아오는 마음은 달랐습니다

사무실 운영이 마음처럼 되지 않던 때에는 특히 그런 저녁이 많았습니다. 손님이 이어지는 날도 있었지만 하루 종일 문 쪽만 바라보게 되는 날도 있었습니다.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면 혹시 손님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습니다. 다른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겉으로는 별일 없는 하루였지만 그런 시간이 계속되면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렇다고 달리고 온다고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음 날 예약표의 빈칸이 갑자기 채워지는 것도 아니고 걱정하던 일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달리기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줬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마음은 나가기 전과 조금 달랐습니다.

땀에 젖은 옷이 등에 붙어 있었고 다리에는 달리고 난 뒤의 묵직한 느낌이 남아 있었습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잠깐 앉아 있으면 몸은 피곤한데 머릿속은 오히려 조용했습니다.

그 정도면 그날은 충분했습니다.

오래전 강변을 떠올리면 발소리가 먼저 생각납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니 당시 몇 킬로미터를 뛰었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록이 몇 분이었는지도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대신 이상한 것들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어둑해지던 강변의 하늘, 하나둘 켜지던 아파트 불빛, 옆으로 지나가던 자전거 소리, 땀이 난 얼굴에 닿던 저녁바람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일정하게 들리던 제 발소리가 생각납니다.

복잡한 마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 아무 생각 없이 발만 움직이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저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달리며 생각이 정리됐던 경험이라고 해서 대단한 답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답을 내야 한다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내일 해도 되는 일은 내일로 남겨두고, 지금 해결할 수 없는 걱정은 잠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고 나면 다시 하루를 살아갈 마음의 자리가 조금 생겼습니다.

그래서 오래전 강변을 떠올릴 때 기록보다 그 조용한 시간이 먼저 생각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대신 답해주지 않았지만, 한참 달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머릿속이 조금 비어 있었습니다. 그날도 그렇게 운동화를 벗고 하루를 끝냈습니다.

혼자 달리던 시간이 쌓이면서 체력이나 피로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때의 다른 장면들이 궁금하다면 아래 이야기를 이어서 보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함께 보면 흐름이 더 잘 보입니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울트라 마라톤이 일반 달리기와 다른 이유

달리면서 몸이 버티지 못하는 순간

야간 마라톤이 낮과 다르게 느껴졌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