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달리며 처음 느낀 어려움

그날은 강변 쪽 하늘이 유난히 낮아 보였습니다. 검은 구름이 잔뜩 몰려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금방 지나갈 비처럼 느껴졌습니다. 운동화를 신고 현관문을 나설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기억에 남을 줄은 몰랐습니다.

강변으로 가는 길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적었습니다. 바람도 조금 불었고 공기에는 비 냄새가 섞여 있었습니다. 멀리 운동장 방향을 바라보니 몇몇 사람들은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며 하늘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별일 아니겠지 싶었습니다.

빗방울이 달라지기 시작한 순간

운동장 입구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얼굴에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비가 갑자기 굵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산을 쓴 사람들은 걸음을 재촉했고 자전거를 타던 사람도 근처 정자로 급하게 들어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잠깐 망설여졌습니다. 괜히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까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운동복까지 갈아입고 나온 터라 그냥 돌아가기에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몇 분은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얼굴에 닿는 비가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습니다. 여름도 아니고 그렇다고 추운 계절도 아닌 애매한 날씨라 몸에 열이 올라오자 상쾌하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생각보다 불편했던 젖은 운동화

조금 지나자 바지가 다리에 달라붙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움직일 때마다 축축한 느낌이 계속 따라왔습니다.

무엇보다 운동화가 문제였습니다.

어느 순간 발끝이 서늘해지더니 물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운동화 안에서 물이 움직이는 느낌이 났습니다. 찰박, 찰박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평소 맑은 날 달릴 때는 숨소리나 발걸음에 집중하게 되는데 그날은 전혀 달랐습니다. 신발 속 물소리가 계속 신경 쓰였습니다. 발바닥이 무거워지는 것 같았고 몸 전체가 평소보다 더 빨리 지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비 오는 날 달린다는 것이 단순히 비를 맞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옷의 무게도 달라지고 몸의 감각도 달라지고 마음도 달라졌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사람보다 소리였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날을 떠올리면 사람 얼굴보다 소리가 먼저 생각납니다.

강변 나무 잎을 때리는 빗소리. 트랙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멀리 다리 아래를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

평소에는 잘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그날은 유난히 크게 들렸습니다.

달리던 사람들 표정도 평소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날씨 좋은 날에는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누곤 했는데 그날은 대부분 말없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묘한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비를 맞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이상한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같은 날씨를 견디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가까워 보였습니다.

"다들 힘들어 보이는데 또 아무도 멈추지는 않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반환점에서 떠오른 오래된 기억

반환점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손끝까지 차가워졌습니다. 숨이 차서 힘든 것보다 젖은 옷이 몸에 붙어 있는 것이 더 불편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김포 신도시 초창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아파트와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지만 처음 들어갔을 때는 공사장이 정말 많았습니다. 비만 오면 길은 금세 진흙탕이 됐습니다. 신발에 흙이 달라붙고 바지 끝은 금방 젖었습니다.

사무실로 출근하면서도 몇 번이나 신발을 털어야 했습니다.

그때도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 달리기와 그 시절 기억이 겹쳐 보였습니다.

불편한 상황인데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계속 움직였던 모습이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편한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공장 다니던 시절에도 그랬고 학원 운영할 때도 그랬고 코로나 시절 조용해진 거리에서도 비슷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불편한데도 계속 가야 하는 날들이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야 알게 된 것

집에 도착했을 때 거실 바닥에는 물방울 자국이 길게 이어졌습니다.

옷은 거의 다 젖어 있었고 운동화에서는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가족들은 왜 굳이 그런 날 뛰고 왔냐며 웃었습니다.

나도 같이 웃었습니다.

솔직히 그 질문에 바로 답은 못 했습니다.

기록을 세운 것도 아니고 특별한 훈련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끝까지 가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그날의 의미를 알게 됐습니다.

그날은 기록에 대한 기억도 아니고 거리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직접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낀 날이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비 오는 날 달리는 것도 별일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직접 운동화를 적셔 가며 뛰어보니 전혀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세상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남이 하는 일은 쉬워 보여도 막상 내가 해보면 전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도 창밖에 비가 내리는 날이면 가끔 그날 생각이 납니다. 운동화 속에서 들리던 찰박거리는 소리, 젖은 운동복의 무게, 그리고 말없이 지나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함께 떠오릅니다.

불편했던 기억인데도 이상하게 싫지는 않습니다. 아마 그날 비를 맞으며 끝까지 달려본 시간이 지금도 어딘가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날의 경험은 이후 달리기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조금씩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아래 글들도 함께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함께 보면 흐름이 더 잘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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