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면서 처음 무릎 통증을 느낀 날
"오늘은 컨디션 좋아 보이시네요."
출발선 근처에서 누군가 웃으며 건넨 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날 새벽 한강 둔치에는 사람들 목소리가 조용히 섞여 있었습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아 강물 위에는 옅은 안개가 남아 있었고, 바람도 세지 않았습니다. 달리기 하기 딱 좋은 날처럼 보였습니다.
출발 전에는 누구나 자신감이 있어 보였습니다. 신발끈을 다시 묶는 사람,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 물 한 모금을 마시는 사람까지 모두 표정이 밝았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몸도 가볍고 기분도 좋았습니다. 오늘은 끝까지 무난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출발 후 한동안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은 새벽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색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자전거 벨 소리가 들렸고 강물에서는 특유의 물 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왔습니다. 옆 사람들과 속도를 맞추며 달리는 것도 기분 좋았습니다.
급수대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자원봉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참가자들은 손을 흔들며 지나갔고 어떤 사람은 웃으며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분위기 자체가 밝았습니다. 긴 거리라는 사실조차 잠시 잊을 정도였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장거리 달리기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출발할 때가 아니라 어느 정도 지나고 난 뒤에 찾아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느 지점을 지나면서 조금씩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숨은 아직 괜찮았습니다. 다리도 크게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먼저 무거워졌습니다.
조금 전까지 즐겁게 달리던 길이 갑자기 길게 느껴졌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강변 길을 바라보니 아직도 가야 할 거리가 많아 보였습니다.
햇빛도 점점 강해졌습니다.
모자 챙 아래로 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운동복은 등에 달라붙었습니다. 팔을 흔드는 것도 전보다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주변을 둘러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씩씩하게 달리던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은 걷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급수대 근처 벤치에는 잠시 쉬는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특히 말없이 앞만 바라보는 표정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누구도 크게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얼굴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들을 보며 이상하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힘든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중간에는 멈추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발걸음이 무거워지니 자꾸 걷고 싶어졌습니다. 그냥 급수대 근처에 앉아서 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대치동에서 학원을 운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교재를 새로 만들곤 했습니다. 밤늦게까지 사무실 불을 켜 두고 수정하고 출력하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눈은 피곤했고 허리도 아팠습니다. 그렇다고 중간에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했던 말이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해보자."
그 생각이 달리기 중에도 떠올랐습니다.
결승선까지 가겠다는 생각 대신 다음 가로등까지만 가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음 전봇대까지만 가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목표를 잘게 나누니 다시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인생에서도 비슷한 순간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도 그랬고, 김포 신도시 초창기 사무실을 운영하던 시절도 그랬습니다.
큰 목표보다 눈앞의 하루를 버티는 것이 더 중요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결승선 통과 장면을 가장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는 다른 장면이 먼저 떠오릅니다.
중간에 체력이 떨어져 강변 난간 옆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순간입니다.
강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천천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새벽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고 다른 참가자들은 각자의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빠르게 달렸고 누군가는 걷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리기는 남을 이기는 운동이 아니라 결국 자기 몸과 대화하는 시간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그날 조금 알게 됐습니다.
그 경험 이후 장거리 달리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기록이나 거리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몸 상태를 먼저 살피게 됩니다. 컨디션이 좋은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체력이 무너졌던 경험은 결코 즐거운 기억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내 몸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조금 더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빠르게 가는 것보다 멈추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도 함께 배웠습니다.
지금도 새벽 한강을 달리다 보면 그날의 안개와 강물 냄새가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체력이 떨어져 힘들었던 순간인데도 이상하게 그 기억은 오래 남아 있습니다.
아마 그날은 기록을 남긴 날이 아니라 나 자신을 조금 더 알게 된 날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아보면 그 경험은 이전의 시행착오들과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아래 이야기들도 함께 보면 달리기를 바라보는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흐름이 이어집니다.
함께 보면 흐름이 더 잘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