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선보다 내 속도가 중요해졌던 어느 날
운동장 바닥을 따라 벚꽃잎 몇 장이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한쪽으로 몰렸다가 다시 흩어졌습니다. 겨울 동안 두껍게 입고 다니던 옷 대신 가벼운 옷차림으로 운동장에 나간 저녁이었습니다.
운동화 끈을 묶고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이상하게 몸부터 달랐습니다. 겨울에는 한참을 움직여야 손끝도 따뜻해지고 다리도 풀리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날은 몇 바퀴 돌지도 않았는데 등에 땀이 조금씩 났습니다.
운동장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었습니다. 산책하는 사람들도 겨울보다 많아졌습니다. 누군가는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빠르게 걷는 사람도 보였습니다.
달력에서 봄이 왔다는 것을 확인한 것도 아닌데 달리면서 먼저 알 수 있었습니다. 겨울이 정말 지나갔구나 싶었습니다.
겨울 동안 운동장에 나가면 가장 먼저 추위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런데 봄이 되니 출발하는 마음부터 달랐습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저녁도 조금씩 길어졌습니다. 운동장 조명이 켜지기 전에 몇 바퀴를 돌 수 있었고, 해가 넘어가는 모습도 천천히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냄새였습니다. 겨울에는 차갑고 마른 공기만 느껴졌는데 날씨가 풀리면서 흙 냄새와 풀 냄새가 조금씩 섞여 들어왔습니다.
그런 날에는 별다른 목표를 정하지 않아도 한 바퀴를 더 돌고 싶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몇 킬로미터를 달렸는지부터 확인했겠지만 여러 계절을 달리고 난 뒤에는 그런 숫자보다 주변 풍경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꽃이 피었는지, 바람이 따뜻해졌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나왔는지를 보게 됐습니다.
봄에 달리는 기분은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과 비슷했습니다. 추운 날씨를 견디며 달렸던 시간이 지나가고 다시 편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습니다.
봄이 짧게 지나고 여름이 오면 운동장의 표정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해가 떨어진 뒤에 나가도 땅에 남은 열기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운동화 밑으로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었습니다.
몇 바퀴 돌지 않았는데 이마에서 땀이 흘렀습니다. 옷은 금방 등에 달라붙었고 숨도 평소보다 답답했습니다.
한번은 운동장을 돌던 분이 수도꼭지 앞에서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웃었습니다.
“오늘은 정말 덥네요.”
저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굳이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날씨가 더워도 평소와 똑같이 달리려고 했습니다. 지난번에 이만큼 달렸으니 오늘도 그 정도는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몸은 생각처럼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속도를 올려도 금방 힘들어졌고, 평소보다 일찍 걷게 되는 날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괜히 운동을 덜 한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더운 날을 몇 번 겪고 나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오늘 조금 덜 뛰었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멀리 가는 것보다 무리하지 않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습니다.
제가 달리기에 가장 편하다고 느꼈던 계절은 가을이었습니다.
여름 내내 몸에 붙던 습한 공기가 사라지고 저녁바람이 선선해지면 같은 거리를 달려도 느낌이 달랐습니다. 숨이 조금 더 편했고 몸도 가볍게 움직였습니다.
강변으로 나가면 풀 냄새가 났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많았고 달리는 사람도 제법 눈에 띄었습니다. 해가 지고 난 뒤에는 강 건너 불빛이 물 위에 길게 비쳤습니다.
어느 날은 조금만 뛰고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몸 상태를 봐가며 가볍게 움직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달렸는데도 몸이 괜찮았습니다.
여기까지만 갈까 하다가 조금 더 갔고, 다음 지점이 보이니 또 거기까지만 가보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몇 킬로미터를 더 달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땀이 식으면서 팔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여름 같았으면 땀이 계속 흘렀을 텐데 가을에는 달리고 난 뒤의 열기가 바람에 천천히 식었습니다.
그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기록이 좋아서 기분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오래 움직이고 난 뒤에도 마음이 편했습니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는 빨리 뛰는 것이 잘 뛰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무렵부터는 편하게 오래 움직이는 날도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겨울이 오면 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밖에 나가기 전부터 마음과 실랑이를 했습니다. 따뜻한 실내에 있다가 문을 열었을 때 찬 공기가 얼굴을 때리면 그냥 다시 들어가고 싶은 날도 있었습니다.
운동장에 도착해도 처음부터 몸이 움직여지지는 않았습니다. 손은 차갑고 다리는 뻣뻣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뛰기보다 천천히 걸으며 몸을 움직였습니다.
조금 지나면 몸에서 열이 올라왔습니다. 입에서는 하얀 김이 계속 나왔고 사람 없는 길에서는 제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습니다.
여름에는 저녁에도 사람이 많았던 길이 겨울에는 조용했습니다. 산책하는 사람도 줄었고 자전거도 드물었습니다. 같은 강변인데 전혀 다른 장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 조용함이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혼자 뛰는 시간이 길어지면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생각하기도 했고, 아무 생각 없이 발소리만 들으며 달리기도 했습니다. 차가운 바람 때문에 얼굴은 시렸지만 한참 뛰고 난 뒤 몸 안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느낌은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는 숫자를 많이 봤습니다.
오늘 몇 킬로미터를 뛰었는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지난번보다 조금 빨라졌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기록이 좋아지면 제대로 운동한 것 같았고 그렇지 않으면 괜히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몇 번 지나고 나니 조금 달라졌습니다.
더운 날에는 자연스럽게 천천히 달렸습니다. 추운 날에는 몸이 풀릴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가을처럼 몸이 가벼운 날에는 계획했던 거리보다 조금 더 가기도 했습니다.
몸도 늘 똑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날씨와 계절에 따라 움직이는 느낌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그 사실을 책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같은 길을 계속 뛰면서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오래전 달리기를 떠올려도 하나의 풍경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등에 착 달라붙었던 여름 운동복이 생각날 때도 있고, 가을 강변에서 맡았던 풀 냄새가 떠오를 때도 있습니다. 겨울밤 하얗게 퍼지던 입김도 있고 다시 봄이 왔을 때 운동장 가장자리에 떨어져 있던 꽃잎도 있습니다.
같은 운동장을 수없이 돌았고 같은 강변길을 여러 번 오갔습니다. 그런데 계절이 바뀌면 그 길은 매번 조금씩 다른 표정을 보여줬습니다.
지금은 그게 달리기를 오래 하면서 얻은 재미 가운데 하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날도 그날의 바람과 냄새는 이상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운동장 바닥을 굴러다니는 꽃잎을 보게 되면 아마 예전처럼 운동화 끈부터 한번 고쳐 묶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공기가 어떤지 느껴보면서 천천히 첫 바퀴를 시작할 것 같습니다.
계절을 지나며 달렸던 기억에는 혼자 달리던 시간과 조금씩 체력이 달라지던 과정도 함께 남아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이어서 보면 제가 달리기를 바라보는 마음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함께 보면 흐름이 더 잘 보입니다.